더불어 사는, 생각하는 농민의 마을
김보혜 (전환마을남동 활동가)
바람과 눈보라가 거세게 불던 날,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한 번은 꼭 방문하고 싶었던 홍성군 홍동면 홍동마을에 다녀왔다. 이번 기행은 2023-2024년 2년간 ‘전환마을’의 가치를 만들었던 인천 연수구와 남동구의 시민운동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했다. 우리는 이번 기행을 통해 세대와 시대의 대안적 생활운동을 시작했던 홍동의 이야기를 들었다.
홍동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세찬 겨울바람은 마을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세차게 방문객을 맞이했다. 그러나 밤새 쌓인 눈은 뽀도록뽀도록 정겨운 소리를 내며 나의 마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었고 하얗게 눈쌓인 미끄러운 시골길을 조심조심 걸으며 홍동마을 곳곳을 돌아보았다.
홍동의 마을 이야기
내가 알고 있던 홍동마을은 풀무학교가 전부였다. 농업기술 대안고등학교인 풀무학교는 자연농법과 귀농을 하는 젊은이들의 성공사례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곳을 방문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홍동마을은 더 오랜 역사와 온전한 마을 공동체를 이룩하고자 하는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곳임을 지역센터 ‘마을활력소’에서 펼쳐진 마을이야기를 들으며 알게 되었다.
홍동마을의 시작, 한국사의 흔적을 간직한 홍동마을의 역사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평안도 정주에 세워진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의 자손이며 무교회주의를 설파하던 이찬갑과 홍동 출신 목사 주옥로는 1958년 농업 기반 교육을 주창하며 덴마크의 국민 고등학교 모델에 농촌을 더한 풀무학교를 세운다. 그리고 1963년 풀무학교는 공식적인 첫 학생을 받고 대안농업 교육의 문을 연다. 이것은 한국의 대안공동체를 꿈꾸는 정신에 영향을 주고 협동조합과 생활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대안운동 문화를 만들어가는 초석을 놓게 된다.
한국에서 무교회주의는 기독교 재단에서 환영받지 못한 종파라고 한다. 이러한 활동은 정치, 사회문화와는 거리를 두고 생활운동을 중요하게 여기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 군사독재 정권은 마을에 모인 사람들을 탄압하며 ‘빨갱이마을’이라는 정치적 수모를 주었다. 한국 사회가 개발의 홍수에 떠밀려 도시가 건설되고 물질과 경쟁의 이데올로기에 취해 성장의 일변도를 내달릴 때 이곳 홍동마을은 한국 최초 풀무신협을 만들고 경제적 순환의 공동체를 구현하기 시작했고 ‘일소공도’의 사상을 바탕으로 농사일과 인문학적 성찰을 균형있게 체화하며 지향점들을 창조해 갔다. 이것은 강원도 원주지역이 본거지인 한살림 창시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정권의 해방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한국사의 흐름이 이곳 홍동을 빗겨가지 않았고 나에게 한국의 정치적 풍파를 그들만의 철학과 지혜로 대안적 생활운동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홍동마을의 역사는 새로웠고 매우 흥미있었다.
하고 있는 일들, 세상살이·살림살이의 모든 것이 있었다
지난해 3월 홍동마을 ‘마을활력소’에서는 ‘우리마을발표회’가 열렸다. 이 발표회에 참가한 마을 속 협동조합은 34곳. 3천여명의 주민이 모여사는 작은 마을에 34곳의 협동조합이 활동하고 그 이야기를 하루를 통틀어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마을에는 50여개 남짓한 협동조합이 현재 활동 중에 있다고 했다. 각 모임들이 활동하고 협동조합으로 설립하여 꾸려가고 있는 그 주제와 활동은 나를 흥분시키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먼저, 마을에는 가장 오래된 풀무신협이 있다. 그리고 홍성 마을화폐인 ‘잎’을 관리하는 홍성지역화폐거래소가 있다. 지역화폐는 홍동마을에 있는 농협에서도 취급하고 있으며 화폐 사용 가맹점은 50여개 상점이 넘는다고 했다. 또한 ‘도토리회’에서는 지역화폐인 ‘잎’을 대출해 주며 돈의 가치를 삶의 가치와 동일하게 만드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사회를 벗어나 살아 본 적이 없는 나로써는 정말 기이한 연대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홍동마을에서 돈이란 그냥 돈일뿐 다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마을에는 어린이집•초•중 •고(대안학교)등학교가 있고 마을 인근 초등학교는 2곳이나 된다. 그리고 풀무전공부와 같은 대학교육 수준의 교육기관과 여러 협동조합에서 하는 평생교육이 있다. 형태로 보자면 초등교육에서 대학 전문 과정까지 이 작은 마을에서 모두 수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돌봄 또한 공립학교와 각 관련 협동조합의 방과후교실 운영 등을 통해 이루어 지고 있어 지역내 교육은 자연스럽게 공유재로서의 인간 양성이 이루어지고 있어 보였다. 교육이 실로 홍동마을에 삶의 뿌리를 내리는 근간이 되고 있었다.
농본 위주의 일상은 순환경제의 기본이 된다. 따라서 각자가 수확하고 풀무전공부에서 수확한 농작물은 ‘풀무생협’에서 사고팔 수 있다. 풀무생협은 현재 아이쿱의 전신이 되어주었다고 했다. 이러한 일생에 필요한 모든 것이 예닐곱의 사람들이 만드는 협동조합에서 시작되고 협력되고 있는 현장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어 의미가 깊었다.
교육과 생필품 보급 뿐아니라 마을사람들의 의료서비스 또한 의료생활협동조합을 통해 보살핌 받고 있었다. 홍동마을에는 큰 병으로 아픈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그것은 자연 속에 지속된 삶의 방식와 보살핌이 있기도 하지만 의료생협으로 실질적인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닐가 싶다. 과거 지역 보건소에 군의관으로 일을 했던 전문의가 가족과 함께 홍동마을로 이사와 의료생협을 만들게 되었고 홍동마을 사람들의 병이 없는 삶을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듯 홍동마을에는 술집과 도서관, 출판사와 목공소 그리고 손수 내 집을 짓는 사람들까지 세상살이·살림살이의 모든 것이 협동조합 안에서 협력과 지지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이들 역시 그들의 욕구에 충실하게 ‘ㅋㅋ만화방’이라는 공간을 제안하고 마을의 한 켠을 차지하며 아이들의 공화국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어른인 내가 보아도 신이 나고 뿌듯했다.
마을사람들, 깊이를 알 수 없는 엮임의 운명공동체
홍동마을의 이야기를 전해준 이곳에 정착하여 15년 이상을 살고 있는 서울 출신의 마을사람, 마을활력소의 서경화님은 이곳에서는 깊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도시민의 삶은 각박하기를 넘어 삭막한데, 공간을 공유하고 시간을 나누는 일상을 살다보니 관계의 깊이는 절로 깊어지는가 보다.
홍동마을에 50여개의 협동조합이 지난 70여년의 시간 동안 생성과 소멸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연을 담은 사람의 자연과 일치된 관계맺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안과 밖에서 조우하는 자연물은 인간을 자연과 유리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고 그러한 깨달음을 마음에 담은 사람들의 연대가 홍동마을 사람들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도시 안에서 우리가 회복할 것이 홍동마을에 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자연의 회복, 작은 텃밭을 가꾸고 수확한 먹거리를 나누고 이웃과 깊은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자연의 일부로 도시의 삶을 재배치해보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렇게 깊은 관계를 맺다 이웃 속에서 고요하게 삶을 마감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나의 홍동 하루살이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술잔을 기울이다 새벽을 맞았다. 밤하늘에는 선연한 별자리들이 영롱하고 바람도 잠을 자느라 세상이 고요했다. 새벽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밤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의 짧은 이야기 속에는 깊은 애정이 있었다. 홍동의 밤의 정취가 꺼내준 이야기에는 농사일에 대한, 연결된 삶에 대한,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지난한 시간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누군가의 경험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나의 인식세계 너머의 세계를 깊게 파고든 그 이야기의 감흥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세찬 바람과 함께 시작한 홍동에서의 하루살이는 이렇게 새날의 찬란한 햇살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천 연수와 남동에서 시작될 전환의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하며 돌아오는 차량에 몸을 실었다.
■ 참고한 책
- 마을공화국의 꿈- 홍동마을 이야기(2014, 충남발전연구소+홍동마을 사람들). 한티재
- 대한민국의 설계자들(2017, 김건우). 느티나무책방
- 우리 마을입니다(2018). 그물코
- 우리마을연감(2024). 지역센터 마을활력소
* 편집자주 - 인천에서 전환마을 활동을 시작한 연수구와 남동구가 처음으로 만나 각자의 활동을 나누기 위한 워크샵을 2025. 1. 8 - 9 이틀동안 홍성군 홍동면으로 다녀왔습니다. 첫날은 마을활력소 에서 홍동마을공동체에 대한 소개를 듣고 마을탐방을 하면서 할머니장터조합, 동네마실방뜰, ㅋㅋ만화방, 우리동네의원, 밝맑도서관, 풀무학교생협 등을 방문했습니다. 저녁에는 홍성환경농업교육관 숙소에서 전환마을활동가 활동공유회가 있었습니다. 이튿날 문당리마을에서 운영하는 쌀빵을 생산하는 카페에서 아침식사후 도토리회, 지역화폐 잎, 산림살림에너지 사협의 에너지마을구상 이야기를 들어보고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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