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들이 연결되어 지도가 되던 날
— 전환마을남동 '함께 만드는 공유지도' 워크샵 현장 기록
2026년 5월 16일, 인천 남동구
이날이 특별했던 이유
2026년 5월 16일 토요일 오후 2시. 남동구 인주대로 511, '활동가연대 같이' 6층 교육실 문이 열렸다.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건 열기였다. 초여름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환경 활동가, 여성 단체, 대안학교 교사, 도시농부, 장애인 인권 활동가, 에너지 전환 전문가까지 — 평소라면 각자의 사무실에서 각자의 일을 했을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었다.
이 자리를 만든 건 '전환마을남동'이다. 2023년 7월 처음 논의가 시작되어, 2024년 3월 만수마을 이음텃밭에서 150여 명의 주민이 모인 가운데 공식 선언을 했던 그 전환마을. 선언문의 첫 문장은 이랬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세상을 바꾸는 마을의 전환을 시작하자."
이날 워크샵의 제목은 '함께 만드는 전환마을 공유지도'였다. 지도를 그린다는 건 표면적인 설명이고, 실제로 하려는 건 훨씬 더 큰 일이었다. 남동구 안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자원들 — 공간, 재능, 물품, 관계 — 을 하나의 판 위에 올려놓고,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는 장면을 직접 만들어보는 것. 개인의 힘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기후 위기 시대에, 마을 단위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만들어가는 첫 번째 실천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모였나?
참석자 명단에는 29명의 이름이 올랐다. 서명란에 펜을 들고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적은 사람들. 그 면면을 보면 전환마을남동이 얼마나 넓은 스펙트럼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의 활동가들과 공동체텃밭의 도시농부들이 참석했다. 인천여성회에서는 남동지부의 부설인 와글와글도서관을 포함해 회원들이 함께했다. 남동평화복지연대에서는 대표와 회원활동가. 인천녹색연합의 활동가, 인천열음교육공동체 교사, 활동가연대 '같이', 생태텃밭협동조합, 전교조, 마을공동체 '지음', 인천해바람시민발전협동조합, 누리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활동가들도 함께했다. 개인 활동가로 참여한 분들도 있었다.
도시농업과 텃밭, 에너지 전환, 여성 공동체, 대안 교육, 장애인 인권, 환경 감시, 생활 기술까지 —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앉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전환마을이라는 이름 아래 가능한 일이다.
워크샵은 이렇게 흘러갔다
STEP 1 — 릴레이 얼굴 그리기
본격적인 매핑 작업 전에 진행된 첫 활동은 예상 밖이었다. A4 용지 맨 위에 자기 이름을 쓰고, 30초 동안 옆 사람의 얼굴을 관찰하며 그리는 것. 그림이 완성되면 다음 사람에게 넘기고, 또 다음 사람의 얼굴을 그린다. 낯선 얼굴의 눈동자 색깔, 주름, 머리 모양을 들여다보다 보면 어색함이 어느새 웃음으로 바뀐다.
단순한 놀이처럼 보이지만, 이 활동의 목적은 명확했다. 도시의 익명성을 깨는 것. '저 사람이 어느 단체에서 왔더라'가 아니라 '저 사람은 눈웃음이 참 좋다'는 인식의 전환. 공동체 안에서 자원을 내놓으려면 먼저 서로가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

STEP 2 — 내가 가진 것, 내가 필요한 것
아이스브레이킹이 끝나면 본격적인 브레인스토밍이 시작됐다. 참가자들은 각자 포스트잇에 두 가지를 적었다. 하나는 내가 줄 수 있는 것, 다른 하나는 내가 필요한 것.
'줄 수 있는 것'이 처음엔 막막하다. 하지만 막상 써보면 생각보다 많다. 수동 트럭, 퇴비 만드는 법, 바느질 기술, 전래놀이 교구, 드론 촬영 장비, 자전거 수리 기술, 고장 난 우산을 고칠 수 있는 손, 텃밭에서 키운 토종 씨앗… 사람들은 자기 포스트잇이 꽤 두껍게 쌓이는 걸 보고 놀랐다.


STEP 3 — 2.5m 지도 위에 남동구를 채우다
교육실 한복판에 펼쳐진 건 2.5m × 2.5m 크기의 대형 남동구 지도였다. 이 지도를 처음 본 참가자들에게서 탄성이 나왔다. 이렇게 큰 지도 위에 자기 동네를 직접 그려본 적이 없으니까.
세 가지 색깔의 스티커가 배포됐다. 빨간 스티커는 공간 자원, 초록 스티커는 나눌 수 있는 것, 파란 스티커는 필요한 것. 참가자들이 하나씩 지도 위에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하자 남동구가 점점 빨갛고 파랗고 초록으로 물들었다.
스티커 붙이기가 끝난 뒤, 서로의 필요와 자원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관심있는 주제별로 그룹이 만들어지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STEP 4 — 실행팀 꾸리기
자원망이 눈에 보이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럼 이건 우리가 해볼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분야별로 소그룹이 모여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잡았다. 1년 단위의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각 팀에 사람이 붙었다.
지도 위에 올라온 것들 — 5대 분야별 자원 전체 공개
이날 지도 위에 올라온 자원들을 분야별로 정리하면 이렇다. 읽다 보면 '이런 것도 자원이 될 수 있구나' 싶은 것들이 많다.
에너지와 순환 — 쓰레기에서 동력을 찾다
가장 많은 아이디어가 나온 분야다. 단순 재활용을 넘어 '순환의 경제학'으로 나아가는 제안들이었다.
인천해바람시민발전협동조합의 최성용 씨가 제안한 주차장 햇빛발전소는 주민 출자로 태양광 발전소를 짓자는 구상이다. 이미 운영 노하우를 가진 조합이 있으니 실현 가능성이 높다. 와글와글 작은도서관이 추진 중인 벌크 세제 스테이션은 포장재를 줄이면서 이웃들이 필요한 만큼 세제를 가져가는 방식이다. 제로웨이스트 샵이 멀리 있어도 동네 도서관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김진덕 씨가 제안한 퇴비 발전소 모델은 더 야심차다. 장애인 자립 생활 센터에서 나오는 미강(쌀겨), 동네 카페의 커피 찌꺼기, 가정의 음식물 쓰레기를 한데 모아 퇴비로 만들고, 그 퇴비를 공유 텃밭에 돌려보내는 순환 구조다. 쓰레기가 비료가 되고, 비료가 먹거리가 된다.
장주경 씨가 마을에서 시도해보고 싶다는 21% 파티는 의류 교환 행사다. 새 옷을 사는 대신 서로의 옷을 바꿔 입는 것. 텀블러·손수건·장바구니 나눔, 붉은줄지렁이 분양, 종이팩 수거 캠페인(이형아)도 함께 올라왔다. 작은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이 일상 속 기후 대응의 전선이다.
먹거리와 나눔 — 토종 씨앗이 잇는 생명의 망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가 중심이 된 토종 씨앗 나눔은 이미 여러 해째 이어온 활동이다. 이날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아메바(김충기)가 내놓은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제가 운영하는 텃밭은 키우는 건 제가 하지만, 수확은 필요한 사람 누구나 와서 가져가도 됩니다." 울타리를 허무는 순간이었다.
장주경 씨의 1인 가구 반찬 나눔과 제철 식재료 요리 교실 제안은 먹거리가 돌봄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보여줬다.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나는 도시에서, 반찬 하나를 나누는 행위가 고립을 막는 사회적 안전망이 될 수 있다. 만수마을이음텃밭, 서창텃밭, 도림텃밭, 해바람텃밭, 이안공동체텃밭의 수확물이 이 흐름에 연결될 수 있다.
생활 기술과 교육 — 스스로 만들고 고쳐 쓰는 힘
가장 다채로운 목록이 나온 분야다. '이런 기술을 가진 사람이 우리 동네에 있었구나' 싶은 놀라움이 연속됐다.
박은희 씨가 내놓은 쉐이빙호스(shaving horse)는 나무껍질을 벗기고 깎는 전통 목공 도구다. 이걸 활용한 목공 기술 나눔 제안이 올라왔다. 고정임 씨의 옷 수선과 헌 옷 활용, 이협 씨(활동가연대 같이)의 자전거 타이어 수리까지, 외부 서비스에 돈을 주지 않고도 마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기술들이 속속 등장했다. 도시에서 잊혀가던 생활 기술들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교육 분야도 풍성했다. 전경아 씨(인천열음교육공동체)가 보유한 전래놀이 용품, 밧줄놀이 도구, 풍물 장비, 국악기 세트는 아이들을 위한 생태 교육에 당장 활용 가능한 자원이다. 김현미 씨(지음)의 영어 회화 스터디, 독서 및 고전 읽기 모임, 댄스 동아리까지 — 마을 학교의 커리큘럼이 이 자리에서 윤곽을 잡았다.
기록과 홍보 — 활동에 서사를 부여하는 눈
전환마을의 활동은 아무리 잘해도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진다. 이날 아메바(김충기)가 내놓은 제안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드론 촬영으로 전환마을의 활동 현장을 기록하고, 블로그 기자단을 운영해 각 활동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것. 드론 장비와 촬영 기술은 이미 갖추고 있다. 필요한 건 함께 기록을 남길 사람들이다.
공유지도 제작과 디지털 데이터 관리, 온라인 홍보 협업 주체 모집도 이 분야에서 제안됐다. 아날로그 지도가 디지털 플랫폼으로 확장되면, 이 모든 기록들이 살아있는 아카이브가 된다.
정책 제안과 돌봄 — 데이터로 말하는 시민 과학
이형아 씨(인천녹색연합)의 제안은 '시민 과학'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아이들과 함께 해양 쓰레기 지도를 만들고, 문학야구장 인근의 쓰레기 투기 실태를 직접 모니터링해 데이터로 만드는 것. 주민들이 직접 수집한 데이터는 구청에 정책을 제안하는 근거가 된다. 행정에 민원을 넣는 것과, 데이터를 들고 정책 제안을 하는 것은 다르다.
종이팩 수거 캠페인(이형아, 2년째 진행 중), 요양원 텃밭 사업 제안, 다문화 가정 초등학생 학습 지원(꽃님), 어르신 일상 돌봄(한수진) 등도 이 분야에 올라왔다. 돌봄이 복지 기관의 전유물이 아니라 마을 안에서 이웃이 이웃을 돌보는 방식으로 설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이 지도에 올라온 공간들
스티커와 포스트잇 만큼 중요한 건, 빨간 스티커로 표시된 공간 자원들이었다. 남동구 안에 이런 공간들이 있다.
만수·구월 권역에는 만수마을이음텃밭, 와글와글 작은도서관(만수6동), 마을공유공간 들락날락(남동평화복지연대, 만수4동), 활동가연대 같이(구월동),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구월1동), 남동구청년꿈터, 주안도서관 1층 세미나실이 자리를 잡았다.
서창·도림·장수 권역에는 도림텃밭(야외 테이블·생태화장실·지하수 사용 가능), 해바람텃밭, 서창텃밭, 서창실습밭, 이안공동체텃밭, 고잔고 옥상텃밭, 열음학교(공구·조립식 이젤·보면대 등 교육 물품 다수 보유)가 있다.
여기에 한살림 구월매장 옆 모임방, 공유공간 지음(구월3동), 주경야독 독서 모임 공간, 인천평화의집 시민참여 협동조합까지 더하면, 남동구는 이미 꽤 촘촘한 공간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몰랐을 뿐이다.
특별히 눈길을 끈 건 안성 세컨하우스 제안이었다. 한 참가자가 "비어 있을 때 언제든 쓸 수 있다"며 내놓은 것인데, 마을의 자원이 지역 경계를 넘어 확장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현장에서 들은 말들
워크샵이 끝난 뒤의 뒷풀이는 더 솔직했다.
34년간 교단에 섰다는 한 교사는 목이 메어 말을 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제 일이었는데, 막상 공동체 앞에서 내놓을 재능이 뭔가 생각해보니 없는 것 같아서 한참 반성했어요." 그러면서 바로 결론을 내렸다. 지금 배우고 있는 영어와,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과 나누겠다고. 전문성이 없어도 괜찮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지금 배우는 것이 이미 자원이다.
아이들과 함께 해양 쓰레기 지도를 만들고 싶다는 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농촌처럼 살고 싶었는데, 인천을 떠나지 않았던 건 텃밭 때문이었요. 전환마을남동을 보면서, 도시 안에서도 그게 가능하다는 희망이 생겼어요."
워크샵에 처음 온 한 참가자는 이날 가장 인상적인 한 마디를 남겼다. "이 비전이 정말 실현된다면, 저 남동구로 당장 이사 오고 싶어요."
이 말들이 이날 워크샵의 진짜 성과였다.
리좀 지도가 꿈꾸는 것들
전체 진행을 맡은 김진덕 씨는 이번 워크샵의 철학적 토대로 '리좀(Rhizome) 지도' 개념을 꺼냈다. 리좀은 뿌리줄기를 뜻하는 말로, 중심도 위계도 없이 수평으로 퍼져 나가는 식물의 성장 방식에서 온 개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개념이지만, 전환마을에서는 매우 실천적인 의미를 갖는다. 구청이 위에서 내려보내는 행정 지도가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필요를 느끼고 자원을 연결하는 수평적 지도.
그가 참조로 든 모델은 영국의 토트네스(Totnes)와 토드모든(Todmorden)이다. 토트네스는 전 세계 전환마을 운동의 발원지이고, 토드모든은 마을 전체를 식용 텃밭으로 만든 '식용도시(Incredible Edible)' 모델로 유명하다. 교육, 공동체, 비즈니스 — 이 세 축이 결합될 때 전환마을은 운동을 넘어 자립적 생태계가 된다.
남동구가 꿈꾸는 다음 단계는 이렇다.
이날 2.5m 종이 위에 그려진 지도는 연내에 온라인 공유 플랫폼으로 옮겨진다. 누구나 자신의 자원을 등록하고, 필요한 이웃을 찾을 수 있는 디지털 리좀 지도. '입주민 모집' 개념을 도입해, 남동구 주민이 아니어도 전환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전환 시민'으로 참여할 수 있다.
경제적 자생도 함께 설계한다. 마을 양조장, 마을 목공소, 의정 감시단. 단순 자원봉사가 아니라, 지역 안에서 경제적 순환이 일어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지역 포인트 시스템도 구상 중이다. 퇴비를 나누면 포인트를 받고, 그 포인트로 제철 채소나 생활기술 교육을 이용할 수 있는 방식.
"올해는 청양고추 자립을 목표로 하자."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작고 선명한 목표에서 시작하는 것, 그게 전환마을의 방식이다.

에필로그 — 당신의 이름을 이 지도에
지도는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다. 매일의 실천으로 채워나갈 현재진행형의 기록이다. 이날 모인 29명의 점들이 서로 연결되어 선이 됐고, 그 선들이 엮여 면이 되기 시작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칸이 훨씬 많다. 비어 있는 그 자리가 바로 당신의 자리다.
수동 트럭을 가진 사람, 바느질을 할 줄 아는 사람, 토종 씨앗을 보관하고 있는 사람, 빈 시간에 아이들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 드론을 날릴 줄 아는 사람, 아무것도 없어도 그냥 함께하고 싶은 사람.
"연결되고 이어질수록 재미있고, 우리 지구 살림의 실천은 마을에서 시작된다."


전환마을남동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환마을남동 오픈채팅방에 들어와서 연결되고, 지도가에도 당신의 이름을 올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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